그땐 그랬지, 암실의 추억

2021-01-25 · ART_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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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신성 인화지를 아시나요?  _사진가 류은규
1980년대 초반, 인화지와 확대기 등 대부분의 암실 관련 장비들은 값비싼 수입 제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국산 인화지와 확대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아폴로 신성’ 인화지와 ‘동남확대기’ 등이 대표적인 국산 장비였다. 암실에서 사용하는 소모품 역시 비쌌기 때문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약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필름 현상액과 물을 1 : 9로 희석해 사용한 적도 있다. 결과물은 상이 연하게 나타나고 말았다. 또, 현상 탱크가 없어서 인화지를 담그는 바트에 필름을 넣고 직접 손으로 교반을 하기도 했다. 결과는 어느 정도 괜찮았지만, 손에서 몇시간 동안이나 약품 냄새가 났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런 다양한 시도들 덕분에 암실 관련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었고,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컬러 확대기를 추억하며 _사진가 김지연
독학으로 사진을 시작한 탓에 처음에는 실수가 많았다. 지인 여러 명이 돈을 모아서 100장짜리 컬러 인화지 한 묶음을 사면, 밝은 조명 아래 모여 앉아 인화지에 침을 발라가며 사이좋게(!) 50장씩 세서 나눠 가지곤 했다. 물론, 인화지가 모두 노광 되는 바람에 모두 버려야만 했던 웃기고도 슬픈 기억이다. 그런가 하면, 사진을 시작한 초기에 운 좋게 헐값으로 ‘Kaiser’ 회사의 컬러 확대기를 구입한 적이 있다. 컬러필름 전용 확대기로 흑백 인화 작업을 하다 보니 노출 조절이 어찌나 어렵던지. 적정 노출값을 얻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많은 인화지를 버려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데이터를 얻었는데, 그 작업이 바로 ‘남광주역’이다. 그 뒤로는 흑백전용 확대기를 사용했지만, 이전처럼 짜릿한 맛은 느낄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중고 확대기와 동거동락을 하며 많은 추억을 쌓고 배웠던 탓이리라.

 


나의 첫 암실작업 _사진가 원춘호
나의 첫 암실작업은 사진 일부를 버닝하고 마스킹(암실 합성)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일포드’ 인화지가 비싸다 보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엘리드’ 회사 제품을 사용했다. 한 박스에 11x14인치 인화지 100매가 들어 있었다. 넉넉한 양을 보며 흐뭇했던 것도 잠시. 수없이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박스에 담긴 인화지가 온데간데 없었고, 그러는 사이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첫 작업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이후에 암실작업에 재미를 붙였고, 흑백과 컬러 외에도 적혈염을 이용한 포스타리제이션(슬라이드) 작업도 시도했다. 슬라이드 필름과 인쇄용 리스 필름에 겹친 뒤 인화하는 작업이다. 두 장을 겹쳐서 인화하면, 피사체 색 중 붉은색을 제외한 부분은 검게 표현된다. 사진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지칠 줄 모르고 다양한 시도를 했던 그 시간들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비닐봉투에 얽힌 비밀 _사진가 유병용
지금이야 필름 현상이나 사진 인화에 관한 전문서적도 많고 온라인에도 관련 정보와 경험담이 즐비하지만, 불과 삼십 년 전만 해도 거의 도제식으로 배워야 했다. 장비와 시설 역시 매우 열악해서 필름 현상과 사진 인화 과정 모두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특히 추운 겨울에, 전지 이상의 대형 인화를 할 때 현상액을 비롯한 정지액, 정착액 등을 일정 온도로 유지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온갖 아이디어가 동원되는 고난도 작업이었다.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K선생님은 흑백 인화의 달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에게는 수온계가 필요 없었다. 그저 손가락 한 마디를 현상액에 넣으면 귀신같이 온도를 맞췄다. 어느 해 겨울, 급하게 대형 인화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항온기가 고장이 났다. 현상액 온도가 자꾸 내려가는데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없다. 싸자” 처음에 무슨 말씀인가 했다. 그러자 빨간 등불 아래서 두 남자가 바지를 내리고 비닐봉투에 소변을 담았다. 그다음 상황은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결국 그 날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도 작업실 한 켠에서 하얗게 먼지가 쌓이는 확대기를 보면 그때의 하이포 냄새가 그립다.



특명! 현상액을 아껴라 _사진가 김시용
현상액을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필름 현상탱크에 릴이 잠길 정도만 약품을 넣은 적이 있다. 그런데 결과물을 확인해 보니, 필름 퍼포레이션 일부에 얼룩이 남아있었다. 현상액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필름 릴이 용액에 전부 담기지 않아 생겨난 결과였다. 특히 더운 여름철에는, 암실작업이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확대기와 필름이 열을 받으면서 필름이 늘어지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 필름으로 인화를 해보면 포커스가 나간 듯 흐릿한 결과물이 나왔다.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었지만, 암실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데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두려움은 네거티브 필름이 현상되는 그 작은 암실이다.”
“Fear is that little darkroom where negatives are developed.”

- 마이클 프리처드(Michael Pritchard)

 


물거품이 된 설렘 _사진가 윤은숙
첫 촬영은 누구에게나 설렘을 준다. 대학 시절 작품을 탄생시키겠다는 기대와 의지를 가지고, 추운 겨울 필름 네 롤과 카메라를 들고 현충원을 찾았다. 촬영과 암실작업을 통해 얻게 될 첫 작품을 고대하며, 정성들여 한 장 한 장 촬영했다. 그리고는 현상과 인화를 위해 작업실로 향했다. 하지만 결과는 몹시 실망스러웠다. 필름이 온통 하얗게 변색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유를 몰라 한동안 멘붕이 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착액을 현상액으로 착각해서 사용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럴듯한 첫 작품을 얻는 데는 비록 실패했지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얻은 덕분에 이후에는 암실작업을 할 때 큰 실수를 피할 수 있었다.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 _사진가 손묵광
1993년 전국을 뒤흔들었던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을 기억하는가. 당시 부산의 기관장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겨서 민자당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돕자고 대선 관련 모의를 했던 사건이다. 그것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정치권에 크게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나는 사진기자였기에 수사가 진행되던 그 식당을 찾았다가 초원 복국집의 사장이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현장 관계자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운 좋게도 뜻밖의 현장을 포착한 것. 그 사진을 당일 석간신문에 게재하기 위해 암실로 달려가서 바로 현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아뿔싸! 마감시간에 쫒기다 보니 마음이 급했고, 실수로 현상액보다 정착액을 현상 통에 먼저 넣는 바람에 사진이 엉망이 됐다. 결국 그 장면은 세상에 없는 사진이 되고 말았다.

 


모험심과 열정으로 _사진가 안종현
한창 암실작업을 열심히 할 때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닥’ 현상액을 사용했지만, 나는 남들과 달리 ‘로디날’ 약품을 주로 사용했다. 코닥과 달리 거친 입자의 사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험심과 실험정신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문득 호기심이 발동해서 비닐을 태워 확대기에 삽입해서 인화한 적이 있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묘한 분위기의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상당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왜 아무것도 안 나오지? _사진가 조해솔
처음으로 암실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당시 작업을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나로서는 하나하나 부딪쳐가며 습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기대를 안고! 무려! 형광등 아래에서! 필름을 빼내고! 릴에 장착! 그렇게 나의 첫 자가현상 결과물이 나왔다. 그런데 어떠한 디테일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흑화은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후 빛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나는 암백도 믿지 못한 채, 늘 암실에서만 필름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급하게 현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자취방 화장실에서 불을 꺼놓고 현상을 하기도 했다. 한동안 고요한 자취방 속에는 환풍기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고, 현상 약품들이 일제히 발산하는 냄새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잦았다.

 

뒤바뀐 결과물 _사진가 송석우
다니던 대학이 산 속에 위치해 있어, 대형카메라를 들고 멀리 나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로 인해 모두 비슷한 풍경을 촬영했고, 과제 역시 죄다 비슷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암실작업을 하면서 학생들 필름이 서로 섞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남의 것을 자신 필름으로 착각하고 현상부터 인화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물을 보고 놀라는 일이 일상이었던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서로 민감해 하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