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같은 전시, 전시 같은 유머

2021-02-23 · ART_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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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영화와 앨범 재킷등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글래머샷의 가족사진



“그는 나를 웃게 만든다.” 개그맨과 결혼한 여성들이 인터뷰에서 주로 하는 말이다. 유머의 힘은 강력하다. 이성은 물론 상대에게 호감을 얻거나, 적의 마음을 돌릴 때 유머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인류에게 유머는 사랑만큼이나 보편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유머는 유아기의 놀이적 마음 상태로 돌아가게 만드는 어른들의 해방감”이라고도 했다. 

사전적으로 유머란 ‘익살스러운 농담이나 사람을 웃게 만드는 의사소통’을 뜻한다. 사람들이 유머를 하는 이유는 아직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유머’를 할 수 있는 생물은 인간이 유일하다는 것. ‘인류(Humanity)’, ‘인간적인(Human)’에서 비롯된 유머의 어원을 떠올리면 유머와 인간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인간은 극심한 고통을 받는 존재이다. 자신이 겪는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것이 유머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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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여행사진 선발대회 부문 외 수상 <사진은 조명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은 안타깝게도 못생긴 외모의 대명사였지만, 그의 재치와 입담은 남달랐다고 한다. 유세 중에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는 비난을 듣자 “내가 정말 두 얼굴을 가졌다면, 이 중요한 자리에 왜 하필 못생긴 얼굴을 가지고 나왔겠습니까?”라는 말로 현장에서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유머의 가장 큰 매력은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를 한 방에 무너트리고, 인신공격을 담은 비난도 가볍게 되받아친다는 것이다. 다른 사례로, 영국의 극작가 조니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자신의 사진을 촬영해준 요세프 카쉬(Yousuf Karsh)에게 “내가 악마처럼 보이지만, 정말 있는 그대로 날 찍었군!”이라고 말한 일화는 그가 가진 특유의 유머감각을 보여준다. 특히 그가 스스로 지어낸 묘비명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역시 그의 재치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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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호, <미망인 시리즈>, 피그먼트프린트, 100x150cm, 2018



세상은 각박하지만 유머는 이를 상쇄시킨다. 그러다 보니 최근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유머 코드가 광범위하게 등장한다. 최근 경북대학교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 <농담, 결코 가볍지 않은>과 <만담 : 조선인의 웃음>은 전시에 유머 코드를 녹인 대표적 사례다. 얼마든지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지만, 그 속에 숨은 의미를 파헤치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한, 이색적인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팀 ‘글래머샷’과 최근에 어느 여행플랫폼에서 주관한 ‘망한 여행사진 공모전’ 등도 유머러스하게 발상을 전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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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원 원맨쇼 웃음의 대결, 지구레코드, 1973 (자료제공 : 롯데갤러리)



유머 같은 전시, 전시 같은 유머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진지하고 심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재미있는 작품은 전시장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2019년 하반기 경북대미술관에서 열렸던 <농담, 결코 가볍지 않은> 전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시는 농담의 심리학적 가치를 예술 속에서 발견하고 소개하는 전시다. 유머러스한 작품으로 관객에게 농담을 던지며 작품에 녹아있는 숨은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진지한 사유가 담긴 작품들로 가득한 일반적인 전시 풍경과 다르다. 그래서일까. 공간에 설치된 작업들을 하나씩 보다 보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작품 자체가 유머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전시장에는 예술가 16인의 사진, 설치, 회화, 영상이 설치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나 타인의 씁쓸하고 암울한 상황을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을 포함해 딱딱한 관계와 시대 상황에 유머러스하게 접근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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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찬란한 나르시스트의 모순된 증명들>, 샤인보드·스피커·앰프·음향, 25x125x161cm, 2006-2007



전시장을 방문하고 싶게 만드는 작품은 포스터로 사용된 김석의 ‘찬란한 나르시시트의 모순된 증명들’ 때문이다. 설치된 사진을 보면 남성의 눈 대신에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고, 헛웃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외형 때문에 유쾌하기만 한 작품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삶의 행복을 작가만의 관점과 진지한 태도로 표현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관객을 웃게 만드는 작품은 또 있다. 정새해의 ‘해변의 여인’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예술가로서의 이상과 현실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의 상황을 하늘, 땅, 바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부유하는 인어공주로 형상화했다.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바꿔 익살스럽고 긍정적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다.

전시 의도를 한 눈에 간파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뭐니 뭐니 해도 사진가 조습의 ‘귀가’다. 그 이유는 작품 속 우스꽝스러운(?) 상황 때문이다. 사진 속에는 어두운 밤을 태양대신 빨간 볼로 비추는 취객들이 등장하는데, 인물들의 눈빛, 자세, 흐트러진 옷차림새가 마치 희극의 한 장면 같다. 이는 작품을 통해 사회 현상이나 특정 사건에 냉소적인 풍자를 하는 조습 특유의 씁쓸한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취객들을 바라보는 학의 애잔한 시선이 우리가 취객을 보며 생각하는 모습과 닮아, 웃기면서도 안타깝다. 옥정호의 <미망인 시리즈> 역시 작가가 물구나무를 선 모습이나 몸이 두 동강 난 듯 보이는 설정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식’ 웃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작가 본인, 우리, 세계라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주제는 진지한데, 정작 메시지를 기발하고 유쾌한 구성으로 풀어냈다. 언어로 치면 자조 섞인 농담 한마디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는 농담이라는 소재가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상호작용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 유머를 건네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고, 무거우면서도 유희가 넘치는 미술 작품들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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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연, <노르스름한>, 디지털 프린트, 130x200cm, 2012



우리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유머코드를 한 데 모은 전시도 있었다. 2019년 하반기 롯데갤러리 영등포점에서 열렸던 <조선인의 웃음 : 만담> 전시가 그렇다. ‘만담’이란 말장난이나 재미있고 우스운 말로 사회를 풍자하며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 전시는 조선시대 고종을 웃기며 찰리 채플린에 비견되었던 일제 강점기 박춘재부터 최근까지의 개그 콘텐츠를 아카이빙 한 전시다. 전시장에서는 1970년대 코미디언 남보원의 유머가 담긴 LP판에서 만담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현태준의 작품이 눈에 띈다.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지만, 천천히 바라보면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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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영화와 앨범 재킷등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글래머샷의 가족사진



유머를 품은 발상의 전환
사진 속 진지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 그리고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 보이는 인물들이 보는 사람을 웃게 만든다. 민망하지만 재미있는 사진들이다. 이렇듯 재치와 익살스러운 장면을 탄생시킨 주인공은 김연중, 이보라, 한대웅 3인으로 구성된 ‘글래머샷’이다. 기존의 정형화된 스타일로 인물이나 가족을 촬영하는 스튜디오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렇듯 유머러스한 사진의 탄생은, 미국의 1980~90년대 가족사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미국에서는 사진촬영을 하나의 이벤트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오래된 사진들을 보면 ‘짠!’하고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3인은 어색하지만 보는 재미가 있는 사진들을 직접 촬영하기로 마음먹었다. 기발하고 유쾌한 발상을 사진에 녹여낸 것이다. 가령, 한국과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아이돌 가수의 앨범 재킷이나 공상과학 영화을 패러디해서 촬영한 사진들도 확인할 수 있다. 글래머샷이 촬영한 가족사진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그러나 콘셉트가 독특해서 매력적이고, 유치하지만 유쾌하다. 코믹한 장면에서 웃고 있거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압권이다. 게다가 그 사진에는 다양한 문화 코드와 시대별 유행하는 사진 스타일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사진의 모티브가 된 시대를 추측하고, 재구성된 이미지 속 구성을 천천히 훑어본다면 더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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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여행사진 선발대회> 공모전 포스터



얼마 전 여행 커뮤니티에서 큰 웃음을 준 클룩(KLOOK)의 <망한 여행사진 선발대회>도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공모전 성격도 이색적이지만, 포스터도 예사롭지 않다. 제목처럼 완벽하게 망한(?) 여행사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행사진이라고 하면 아름답고 멋있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공모전은 여행지에서 최고의 인증 사진을 남기길 원했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결정적 순간들을 공모 대상으로 했다. 시각적으로 유머러스한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의도와는 다르게 담긴 장면에 주목해,그마저도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사실이 사진에서 느껴진다. 

 



책으로 유머를 만나는 법
최근 서점에서 유머 관련 책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유머란 무엇인가>(문학사상 펴냄)는 인문학적 관점으로 유머의 본질과 기능을 파고든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책이다. 유머로 상대의 이견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지, 키득거리거나 소리 없는 웃음처럼 웃는 행위와 소리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유머에 대한 이론을 펼친 고대 철학자부터 근대 사상가들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 “인간은 설교로는 고칠 수 없던 잘못들을 유머를 통해 고칠 수 있었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유머의 기능을 차근차근 곱씹어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머의 가치를 어필하는 <바닥을 칠 때 건네는 농담>(이야기나무 펴냄)은 40대 벤처투자전문가이자 작가인 손창우가 가족 여행을 떠나기 직전 갑작스러운 뇌종양 판정을 받고 완치에 이르는 과정을 써내려 간 투병일지다. 책에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라는 작가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투병이라는 심각하고 힘든 일상에서 발견되는 웃음의 순간과 이에 대한 작가의 유머러스한 생각이 담겨있다. 치료의 과정을 감사하게 여기며 유머를 잃지 않은 그의 태도가 인상적이고, 보는 사람에게는 재미와 함께 마음 따뜻한 울림을 선사한다. 한편,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조커>에는 아등바등 살아가던 주인공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난 후에야 진정한 웃음을 터뜨리며 계단으로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유머의 이점은 단순히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에 있지 않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게 만들고, 특정 대상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식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유도한다. 문화예술계에 다양한 유머코드가 등장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