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간 _ 리차드 투쉬맨

2021-03-24 · ART_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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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투쉬맨(Richard Tuschman)은 에드워드 호퍼를 사랑하는 사진가로 잘 알려져 있다. 빛을 감각적으로 다루는 호퍼만큼이나 공간 속 빛과 어둠, 인물의 미묘한 감정선을 사진에 담아낸다. 그외에도 다양한 화가들의 표현방식을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Hopper Meditations>, Woman in the SunⅡ, 2012

<Hopper Meditations>, Woman and Man on a Bed, 2012

 

에드워드 호퍼를 향한 애정
구글에서 리차드 투쉬맨과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이름을 검색해보자. 검색 결과에서 ‘이미지’ 메뉴를 클릭하면, 섬네일 사이즈의 이미지들이 빼곡히 나타날 것이다. 어떤 것이 리차드 투쉬맨의 사진인지, 어떤 것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만약 해상도가 떨어지는 이미지라면, 혼란은 더 가중될 것이다. 이는 리차드 투쉬맨의 오마주 작업이 그만큼 정교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테다.


리차드 투쉬맨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는 ‘당연히’ 빛을 감각적으로 다루는 에드워드 호퍼다. 호퍼가 그린, 창문으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주인공에 동화되는 것만 같다. 햇살을 향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저 사람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 것일까. 뒤돌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저 사람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흡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가 떠오르는 화면 구성에선, 치열한 열망보다는 외로움과 상실에 대한 불안이 먼저 느껴진다. 바로 옆에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만 뚫어져라 보는 오늘날 우리네 모습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투쉬맨의 <Hopper Meditations>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호퍼 바라기’답게 사진 속 얽혀 있는 미묘한 감정선이 인상적이다. 사진의 선명한 재현력이 호퍼 회화 특유의 분위기를 깰 것 같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직접 제작한 디오라마(그림으로 된 배경에 축소된 모형을 설치해 만든 장면)가 호퍼가 선사하는 고독감을 그대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사진 속 여성 모델도 눈여겨봐야 한다. 호퍼의 뮤즈이자 아내인 조세핀(Josephine Hopper)과 똑 닮은, 고전적 외모를 가진 인물을 섭외했다. 호퍼를 향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대목이다.

 

<Once Upon A Time Kazimierz>, The Potato Eaters, 2014

<Once Upon A Time Kazimierz>, Measuring, 2015

 

빌 브란트, 렘브란트, 반 고흐 등 거장의 표현 방식
리차드 투쉬맨이 에드워드 호퍼만 오마주한 것은 아니다. 사진가 빌 브란트 포함, 렘브란트, 반 고흐, 발튀스, 요하네스 베르메르, 조르즈 데 키리코 등에게 경의를 표한 작업도 있다. 바로 <Once Upon A Time In Kazimierz>다. 이 작업은 1930년 폴란드의 유대인 지구 ‘카지미에시’에 사는 유대인 가족의 삶을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허구다. 아내 고향인 크라코프를 방문했을 때 영감을 받고 진행했다. 짙은 ‘상실감’이 느껴지는 이 작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한다. ‘홀로코스트’는 1945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된,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그는 당시를 상상하며, 잔혹한 개인적·사회적 역사를 시각적으로 엮어내기 위해, 그리고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거장들의 표현 방식을 오마주했다.


<Once Upon A Time In Kazimierz>는 시각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Hopper Meditations> 연장선에 있다. 디오라마를 사용한 것도, 수수께끼 같은 장면을 연출한 것도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예술가의 모든 것에 사심을 담는 대신, 예술가의 표현 방식만 오마주했다는 것이다. 반 고흐와 조르즈 데 키리코 그림에서 감도는 우울한 공기, 사선으로 들어오는 렘브란트의 빛, 우리 삶 기저에 깔린 무언가를 자극하는 빌 브란트의 극단적인 원근법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개별적인 호퍼 작업과는 달리, <Once Upon A Time Kazimierz>는 사진이 모여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작업은 화목한 가정, 성실한 노동자, 가족의 해체 순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긍정적인 것에서 부정적인 것으로의 흐름을 묘사하듯, 작업의 톤도 점점 어두워진다. 이로 인해 뒤로 갈수록 비극적인 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다만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기에 비록 결과는 알지만,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충격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익숙한 거장의 표현 방식을 오마주한 덕분에 작업이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그 잔상이 계속 남아 쉬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Richard Tuschman 1990년대 초부터 포토샵을 활용한 디지털 사진작업을 해왔다. 사진과 회화, 아상블라주를 결합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Prix de la Photographie Paris’, ‘International Kontinent Awards’ 같은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다. 미시간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www.richardtuschm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