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색 _ 윤정미

2021-04-19 · ART_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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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프로젝트 II - 정미와 정미의 파란색 물건들, 라이트젯 프린트, 2019

 

핑크색을 좋아하는 딸아이를 기록하면서 시작된 <핑크 & 블루 프로젝트>가 15년째 이어지고 있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주제를 파고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하다.
한 가지 주제를 지속한다는 것이 지겨울 때도 있다. 내가 관객이라도 그 사진이 그 사진같아 구분이 안 될 것 같다. 중간중간 다른 결의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컬렉터 프로젝트>, <근대소설>, <반려동물> 등이 대표적이다. 작업을 드문드문 진행했기에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전시가 계획되면, 1~2년 전부터 일정에 맞춰 작업했다. 미국 아이들의 경우 2009년과 2015년, 각각 2~3주 동안 집중적으로 촬영했다. 사실, 연작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분홍색만 좋아하던 딸이 초등학생이 되자 하늘색이 좋다고 하는 게 아닌가. 당시 다른 아이들의 성장 과정도 찍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작업을 이어왔다. 미국 아이들보다 한국 아이들 찍는 게 몇 배 더 힘들었다. 학교가랴, 학원가랴, 군대가랴. 바빠도 너무 바쁘더라.

 


<LIFE> 표지도 장식했다. 작업이 우리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
내 작업이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아닌가. 이러한 내용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에 이런 현상이 있었지!’하고 돌아보게끔 한 것 같다. 딸아이만 그런 줄 알았는데, 유치원에 같이 다니던 유대인, 일본인, 중국인 여자아이 모두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살면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 자연스레 작업으로 이어졌다.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공감대 형성인 듯하다. 뉴욕과 서울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있음에도, 개인 소지품을 통해 사회의 한 단면이 공통적으로 드러나니 말이다.

 


작가로서의 촉이 좋은 것 같다. <핑크 & 블루 프로젝트>와 <반려동물>을 보면, 전시가 개최된 뒤 얼마 안 가 작업 주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더라.
사진은 시대 흐름에 반응하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언제 보여주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작업을 10년, 20년 해서 발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기 프로젝트로 진행해서 발표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터넷으로 인해 정보가 금세 퍼지니까.


한국 사진가들의 작업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이 있냐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길을 모를 뿐이다. 국내 현실이 척박하니까. 반면 미국 사진 시장은 터가 단단하고, 작업을 유통할 수 있는 매체와 플랫폼이 많다. 이들과 네트워킹이 잘 되어 있는 한국 큐레이터가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 현상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일까.
다섯 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도 아닌데 분홍색 옷만 입었다. 이와 관련,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라는 질문이 많다. 하지만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 내 작업은 표본이 적고, 사회과학연구를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핑크 & 블루 프로젝트>는 ‘사회·문
화적 관점에서 코드화된 색과 젠더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는 이가 내 작업을 통해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금상첨화다. 마트만 가더라도 성 역할을 규정짓는 장난감이 너무 많다. 여자 아이는 소꿉놀이, 남자아이는 로봇과 칼이 대다수
다. 고무적인 것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 장난감 공구 상자에 분홍색이 들어가고, 파랑, 초록 일색이던 블록 장난감에서 분홍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관습화·제도화된 젠더와 색의 관계(남녀 신생아 팔찌 같은)가 단숨에 바뀌기는 힘들 것이다.


여담이지만, 섭외를 하려고 작업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는데, ‘아이를 망치려고 그렇게 장난감을 많이 사주냐’ 같은 댓글이 달려 씁쓸한 적이 있었다. 내 작업은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사회 현상을 보여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작업이 젠더와 색의 관계를 넘어 소비주의, 물질주의로 해석될 수 있기에 개인한테 비난이 가는 것을 늘 조심한다.

 

핑크 프로젝트 - 예림이와 예림이의 핑크색 물건들, 뉴저지,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variable size, 2005

 

<핑크 & 블루 프로젝트 Ⅱ, Ⅲ>은 첫 작업에 참여한 아이들의 3~4년 후, 10년 후를 추적한 시리즈다. 어떤 점이 달라졌나?
남자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니 다양한 색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분홍색 옷을 입고, 분홍색 문구류를 사용하는 건 터부시되는 것 같았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이와 비슷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여자 초등학생에게 파란색 필통을 선물했더니 펑펑 울더라. 어렸을 때 형성된 고정관념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학생이 분홍색을 입으면 멋쟁이 소리를 듣지만, 여전히 남자는 검은색, 회색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오히려 작업이 성 역할, 무의식적 욕망을 부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모델이 오로지 분홍색 혹은 파란색 물건만 가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소유한 것 중 분홍색과 파란색을 취사선택해서 보여준 것이다. 여러 가지 물건을 섞어서 촬영하면, 이는 색을 말하는 것이 아닌, 소유에 관한 작업이 된다. 사진은 130으로 표현해야 100으로받아들이게 되는 매체인 것 같다. 선택과 집중을 극대화했다고 보면 된다.

 

 

모델의 취향이 변하는 것과 달리, 작업 형식은 유형학적 인물사진을 고수하고 있다. 책을 촬영하고, 책을 설치하는 이번 전시가 변화를 보여주는 모멘텀이라고 해도 될까.
신선하게 작업하고 싶은 건 모든 작가의 꿈이다. 2010년 ‘갤러리 인’ 전시가 끝나고 작업을 묵혀둘까 고민했었다. 니콜라스 닉슨의 ‘네 자매 사진’처럼 남몰래 오래 찍었다가 사진집 형식으로 먼 훗날 공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준비했던 것이2018년 ‘일우사진상-출판부문’에 선정됐다. 전시와 출판을 기점으로 하게 된 <핑크 블루 관찰>은 도서관과 서점 ‘사회학/여성학’ 분야에서 볼 수 있는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재배열해 촬영한 작업이다. 페미니즘 관련 책을 보면 유독 표지가 분홍색이 많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책에도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인들로부터 전달받은 핑크 & 블루 책들도 사진과 설치 형식으로 선보였다. ‘요리, 여성, 연애’ 같은 키워드와 ‘공학, 건축, 비즈니스’ 등의 키워드가 주로 어떤 색과 연결되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번 전시를 두고 <핑크 & 블루 프로젝트>와 똑같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새로운 것을 선보이기 위한 일종의 도약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너무 분홍색과 파란색만 이야기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가?
어렸을 때는 노란색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노란색 니트 치마와 조끼를, 중학생 때는 연노랑 바지와 점퍼를 교복처럼 입었다. 성인이 돼서는 좋아하는 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옷장을 열어보니 검은색과 파란색이 많더라. 올봄 ‘갤러리 가비’에서 열린 <블루진> 전시에 파란색 옷 앞에서 찍은 ‘셀프 포트레이트’를 출품했다. 돌이켜보면, <핑크 & 블루 프로젝트> 하면서 분홍색 물건을 자주 사게 된 것 같다.

 

반디앤루니스, 라이트젯 프린트, 32x67cm, 2018

<핑크 & 블루 프로젝트>가 소개된 잡지들, 일우 스페이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