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태의 NFT 아트 _ 픽셀 in 픽셀

2021-05-28 · ART_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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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소셜 미디어 ‘피블(PIB)’이 전시 기획사 ‘나비타아트’와 함께 선보인 황규태 작가의 NFT 아트 전시 <PIXEL PIXIE>가 화제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갤러리/미술관이 아닌, 두 곳의 메타버스(가상공간)에서 진행됐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매체에서 언급된 것처럼, 현재 NFT 아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명과 암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원로작가로 손꼽히는 황규태의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에 주목하고자 한다.

 

<Pantheon of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솜니움 스페이스

 

NFT 아트 시장의 급팽창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꼬리에 무지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고양이 ‘냥캣(Nyan Cat)’의 움짤을 본적이 있는가. 인터넷밈(Internet meme, 모방형태로 급속도로 퍼져 사회 문화 일부로 자리 잡은 트렌드)의 대명사 격인 이 고양이를 아트 마켓에 내놓는다면, 가격대가 어느 정도에 형성될까. 혹자는 “가상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대상에 가격 매기는 일이 가당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2021년에는 가당한 일이 되었다. 지난 2월, 냥캣에게 ‘300.00 ETH(약 7억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었기 때문이다. 놀라기엔 이르다. 냥캣은 빙산의 일각이다. 지난 3월,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매일 그린 5,000장의 디지털 그림을 한데 모은 비플(Beeple)의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가 6,930만$(약 780억 원)에 낙찰됐다(생존작가 작품 중 세 번째로 높은 가격). 이뿐만 아니라,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Morons>는 ‘228.69 ETH(약 4억 3천만 원)’에, 우리나라 팝아티스트 마리킴의 <Missing and found>는 ‘288.00 ETH(약 6억 원)’에 팔렸다. 디지털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작업임에도 말이다.

 

미술시장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위의 금액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건 블록체인 기반의 NFT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NFT 아트는 실물이 아닌,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시각예술이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을 의미하는 NFT는 희소성을 갖는 디지털 자산이다. NFT는 토큰 하나하나에 고유 정보가 부여되어 있어, 블록체인 내 토큰을 다른 토큰으로 대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다른 암호화폐와 차별화되는 부분으로, 이로 인해 NFT 아트는 원본성, 유일성 등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소유권이 달라질 때마다 기록이 블록체인에 저장돼 복제와 변조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래가 기록된 수십만 개의 디지털 원장[Ledger]이 사슬[Chain]처럼 엮여 있어 조작 불가능). 더불어 전통적인 경매 방식에서는 작품 소유가 바뀌어도 작가에게 돌아가는 수익이 없지만, NFT에서는 계약을 통해 작품 재판매가 일어날 때마다 로열티를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앞의 사례에서 보았듯 가격까지 높다.

 

시각예술 시장의 뜨거운 감자인 만큼, 갑론을박도 치열하다. 비플(Beeple)은 “그동안 예술가들은 디지털 기술로 작품을 만들어 인터넷에 공개했지만, 이를 진정으로 소유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NFT 등장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디지털 예술 복제품은 누구나 온라인에서 볼 수 있지만, NFT 아트는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해준다.”라고 말했다. 반면,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지난 4월 팟캐스트 <Waldy and Bendy’s Adventures in Art>에 출연해 “NFT는 I.C.S(International 국제적인, Crooks 사기꾼, Swindlers 도둑놈들)다.”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NFT 아트가 인터넷 링크로 컴퓨터 안에 갇혀 있다가, 컴퓨터 안에서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추측건대, 호크니는 실물(붓 터치, 프린트 등)만이 시각예술의 필수조건이라 생각했으리라.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서는 NFT가 미술시장의 거품 혹은 사기가 될지, 새로운 대안이 될지 적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먼저, ‘거품 혹은 사기’에 대한 우려는 ‘가격’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술품 경매보다 몇 배는 비싼 금액에 판매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술품 소장이 거대 자본가의 전유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비플의 경매 이후 NFT 아트의 가격이 엄청나게 내려갔다고 한다. 낙차 큰 커브의 종착점이 어딘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만, NFT 아트 세상이 구축됐기에, 거품이 사라지더라도 NFT 아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새로운 대안’은 ‘생활 방식의 변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점점 시각예술이 ‘부유하는 이미지’ 범주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체감할 것이다. 스마트폰 액정 위에서 손가락으로 이미지를 빠르게 넘겨보는 행위는 이제 일상이다. 더 나아가, 작품 디테일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보다는, 핀치줌을 이용하는 게 디지털 시대의 미덕 아니던가. 이처럼두 가지 관점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어우러질지 상충할지 단언할 수 없기에 명징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작금의 현상이 급변하는 플랫폼 속 시각예술의 가치를 재고할 기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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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EL PIXIE>, ‘솜니움 스페이스’ 전시 전경

우리의 관성적인 삶(걷기, 중력 등)이 적용된 공간 ‘솜니움 스페이스’에는 16점의 신작이 설치됐다. 이곳에는 하나의 미술관만이 존재한다. 

somniumspace.com/parcel/4500

 

 

<PIXEL PIXIE>, ‘크립토복셀’ 전시 전경

오로지 정사각형만 인식하는 세계관을 가진 ‘크립토복셀’에는 20점의 신작이 설치됐다. 이곳은 여러 개의 미술관이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www.cryptovoxels.com/play?coords=N@782E,340N,1.5F

 

 

디지털의, 디지털에 의한, 디지털을 위한

픽셀은 비트(bit)의 분열과 융합의 이합집산이 엮어내는 미개의 행성이다. 이 행성은 태양계를 훨씬 벗어난 탐미의 성간 어느 지점에 있다. 나는 이 알몸의 행성에 예술이라는 옷을 입혀놓고 그와 나는 은밀히 비밀결탁하면서 환희의 맨발로 춤을 춘다. 나는 오랜 세월 픽셀과 동거 동침하면서 그가 보여주는 몸짓과 초월적 반응에 경의하고 있다. 그와 내가 추는 이 봄의 제전은 말레비치의 백 년에 바치는 헌사이다. - 황규태

 

NFT 아트 세상에서 눈에 띄는 작가가 있다. 황규태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황규태는 한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원로작가다.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사진이 주를 이루던 1960년대, 황규태는 아날로그 몽타주, 이중 노출, 합성 같은 파격적인 시도를 했고, 디지털 이미지에 관한 관심이 태동했던 1980년대부터는 디지털 몽타주, 콜라주 같은 다양한 실험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디지털 이미지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픽셀’을 발견했으며, 픽셀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시각적 유희에 매몰돼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 황규태는 NFT 아트 무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또 다른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록체인 소셜 미디어 ‘피블(PIB)’이 전시 기획사 ‘나비타아트’와 함께 선보인 황규태의 전시 <PIXEL PIXIE(픽셀의 요정)>는 두 개의 메타버스(가상을 의미하는 Meta + 현실을 뜻하는 Universe = 현실과 연동된 가상세계)에서 진행됐다. 작품은 솜니움 스페이스(Somnium space)에 16점, 크립토복셀(Cryptovoxels)에 20점 설치됐으며, 개별 작품을 클릭하면 NFT 경매 플랫폼 ‘오픈씨(Opensea)’로 연결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두 개의 메타버스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솜니움 스페이스’는 우리의 관성적인 삶(걷기, 중력 등)이 적용된 공간이요(네이버 제페토와 비슷하다), ‘크립토복셀’은 이곳만의 세계관(오로지 정사각형만 인식)을 가진 공간이다. 또한, ‘솜니움 스페이스’에는 하나의 미술관만이 세워져 있으며, ‘크립토복셀’에는 여러 개의 미술관이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황규태와 NFT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운명이란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둘 사이를 잇는 건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미 오래전, 황규태는 실제 빛을 이용해 찍은 사진을 확대해보면서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 요소인 ‘픽셀’과 마주했다. 한편, 픽셀로 구성된 메타버스 안에서 작업을 보기 위해선 인공의 빛(디스플레이)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자연의) 빛과 (인공의) 빛이 이어진 연결고리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황규태, 픽셀, 메타버스 등의 키워드가 서사성을 띤다는 것. 현실에서 찍은 디지털 사진을 통해 말레비치 조각을 확인한 것(놀랍게도 황규태의 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가상세계와 멀리 떨어져 메타버스의 흔적을 찾은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과 메타버스는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본다는 것과 의식의 확장) 등이 이를 대변한다. 종합하자면, 황규태와 NFT의 만남은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이미 실재하던 것이 메타버스 형태로 나타난 셈이다.

 

이와 더불어 <PIXEL PIXIE>는 ‘디지털 원본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번 전시를 위해 황규태는 디지털 환경에 맞춰 신작을 제작했다. 기존 작품을 ‘민팅(Minting, 블록체인화)’하는 건 디지털 세상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물(붓 터치, 프린트 등)이 따로 있는 작업을 메타버스에 설치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메타버스에 전시된 것을 그림자(가짜)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지 않을까. 디지털 세상의 원본이란 온전히 디지털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을 지칭하는 건 아닐는지. 다시 말해, 픽셀의 세상에선 오로지 픽셀만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다. 비록 ‘빛’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현실의 빛은 디지털 원본을 이해하려는 도구 혹은 흔적일 뿐이다.

 

NFT 아트를 예술의 확장성 안에서 본다면 ‘자유로운 표현’, ‘변화’, ‘해방’ 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나, 사진의 잣대로 본다면 ‘권위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여전히 사진이란 ‘멀끔하게 촬영한 피사체를 프린트해 디아섹이나 원목 액자에 넣어야 한다.’라는 인식이 강하니까. 하지만 NFT 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선 사진과의 이원화가 필수다. 현실의 빛을 이용해 카메라로 찍은 것이 사진이라면, NFT 아트는 가상의 빛을 이용해 그린 그림이다. 한마디로 ‘디지털 회화’라고나 할까. 이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프린트를 위해 포토샵을 작동했던 손이 마우스를 클릭하고, 태블릿 펜을 움직이는 손으로 전환된 것과 다름없다. 즉, 작업이 위치하는, 작업을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급변한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작업에서 시각적 쾌감, 조형적 감각을 느끼며, ‘무엇을 보고, 이해해야 하는지’ 탐구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즉,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관념적·언어적 동굴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냐의 차이지, 시각예술을 감상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황규태 작가(오른쪽), ‘나비타아트’ 디렉터 안종현 작가(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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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EL 16>, 솜니움 스페이스

 

픽셀의 항해

_ 황대원(미술비평)

 

사진작가 황규태의 개인전 <PIXEL PIXIE>가 크립토복셀(cryptovoxels)과 솜니움 스페이스(somnium space)라는 두 곳의 가상세계에서 동시에 열렸다. PC로 접속해서 두 미술관을 둘러보고, 솜니움 스페이스 전시는 오큘러스를 통해서도 관람해 보았다.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된 작업들의 ‘스펙터클’이 기대 이상으로 인상적이며, 세련된 전시 공간에서도 기획자들의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게임을 찾은 것처럼 전시에 몰입하면서도, 한 가지 의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황규태 작가의 사진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메타버스 플랫폼이 제공하는 환경의 제약에 순응할 수밖에 없기에, <PIXEL PIXIE>에서 보여주는 그의 작업들의 해상도는 낮은 편이었다. 크립토복셀에 비하면 솜니움 스페이스의 풍경이 그나마 현실에 가깝지만, 애초에 그곳들은 실제 세계와 다른 질서를 갖는 다른 세상이다. 나는 물리적 공간에서 본 그의 작업과 비교하며 가상세계의 이미지를 바라보았다.

 

황규태의 픽셀 연작은 하드 에지 회화처럼 선명하고 견고한 색과 도형의 조화를 보여준다. 그것이 사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작가가 그린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촬영한 이미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단순한 감각적 매력을 넘어서 느껴지는 경이로움이 있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이 놀라운 세계를 발견했다. 어느 날 브라운관 TV 모니터를 촬영한 자신의 작업을 보니, 한쪽 구석에 티끌처럼 보이는 자국이 남아 있었다. 늘 ‘궁금증 환자’를 자처하는 그는 이 자국을 지우는 대신 확대하여 살펴보았고, 거기에 모여 있는 사각형 픽셀을 발견했다. 그것은 디지털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20세기 초에 말레비치가 그린 절대주의 회화의 사각형을 닮은 모습이었다. 말레비치가 도달한 것이 회화의 순수한 구성 요소라면, 황규태가 본 것은 디지털 이미지의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기본 요소였다. 픽셀은 비단 사진뿐 아니라 TV, 컴퓨터, 스마트폰 등 도처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성하는 이미지의 근원이다.

 

픽셀의 발견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사진가 황규태가 수십 년간 지속한 실험의 결실이다. 그는 청년 시절에 주로 흑백 리얼리즘 사진을 찍다가, 1965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 본격적으로 컬러 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아직 사진 ‘예술’이라고 하면 흑백 사진을 의미하던 시대에, 그는 서구 사진계의 최신 경향에도 뒤지지 않는 실험적, 주관적 컬러 이미지를 모색한 이단아였다.1) 차용, 필름 태우기, 포토몽타주 등 다양한 기법을 쓰는 황규태의 사진은 현대의 과학과 문화, 일상의 단편을 자유롭게 뒤섞으며 때로는 세기말적이고 어두운,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는 2000년대 이후까지도 이런 작업을 지속하는 동시에, 최신 기술을 활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거듭 추구했다. 픽셀 사진이 탄생한 1990년대 후반에도 그는 이미 주위의 다양한 사물을 현미경으로 보듯 대형 카메라로 접사하고 확대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2)

 

픽셀을 발견한 황규태는 그 미시적 우주의 무한한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픽셀 연작은 모두 비슷한 사각형이 아니라 매우 다채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그중 <pixel>(2018) 시리즈나 <pixel the rite of bits>(2018)와 같은 작업들은 아라베스크가 떠오르는 신비한 문양을 보여주는데, 이는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하는 과정 중간에 나타나는 이미지다. 그리고 이를 더 확대하며 끝까지 가면 <pixel; cross & square>(2017)처럼 견고한 단색 사각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이미지의 실체를 극한까지 정교하게 기록하고 드러낼수록, 그의 작업은 사진의 틀을 벗어나 이미지를 해체하고 비물질적 추상의 세계로 나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미 도처에 존재하는 픽셀의 형상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황규태의 사진은 레디메이드의 성격을 갖는다. 다른 한편, 그의 이미지는 작가의 창조적 주관성이 개입된 포스트프로덕션의 산물이기도 하다.3) 관객이 보는 픽셀들의 아름다운 형태와 조화는 바로 그것을 찾기까지 확대한 장면을 프레임에 넣은 작가의 행위와 미적 감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 그는 다른 몽타주 작업에서 하듯이 상이한 출처에서 얻은 픽셀을 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PIXEL PIXIE>는 가상공간에서 문을 연 나비타 미술관의 첫 번째 전시다. 기획자들은 최근 주목받는 메타버스 공간의 전시와 NFT 아트의 긍정적 미래를 전망하되, 금전적 가치나 ‘인기’를 넘어서는 예술적 가치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런 의도에 따라 무엇보다 먼저 소개해야 하는 작품으로 황규태의 픽셀 사진을 선택했다.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그의 추상적 이미지 이면에 축적된 예술적 실험의 긴 역사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픽셀 사진은 태생 자체가 디지털 기술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에, 메타버스 공간과의 높은 호환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황규태의 작업이 디지털 세계의 근원에 대한 미학적 탐구를 담는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디지털 사진의 기본 요소인 픽셀은 메타버스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 있는 레고 블록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이 갖는 의미는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융합이 확대될수록 더 깊어진다. 아마 기존의 픽셀 작업을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한 작품으로 전시를 열었어도 미학적 가치는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규태 작가는 기존 작업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PIXEL PIXIE>에서 전시하는 36점의 작품은 모두 작가가 디지털 환경에 맞춰 새롭게 제작한 픽셀 이미지다. 그중 하나인 <Forgetting curve of Ebbinghaus>(2021)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나 물속에 서 춤추는 해초처럼 움직인다. 작가는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해보면서 상상의 눈으로 픽셀들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미시적 세계의 세포처럼 그것들은 증식하고, 결합하고, 분열하며 더 큰 세계의 형상을 빚어낸다. 이제 가상의 미술관에서 픽셀은 실제로 유영한다. 정지해있는 다른 몇몇 작업들도 마치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이것은 사진에서 한 걸음 더 이탈하는 황규태의 또 다른 모험이자 유희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은 회화가 더 나아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지만, 황규태의 픽셀은 디지털 공간에서 유영하며 그속에 녹아든다. 픽셀은 드넓은 가상세계에서 다시 결말을 모르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1) 박상우 (2016), 「황규태의 1960-70년대 초기 사진 연구」, 『AURA』, Vol. 0, No. 37, pp. 19-32.

2) 이영준 (2017), 「픽셀 탐험의 선구자 황규태」, <Pixel> 전시 서문: https://neolook.com/archives/20171013i

3) 문혜진 (2018), 「미니멀한 사진이란 무엇인가」, <photo, minimal> 전시 서문: https://neolook.com/archives/20181207f

 

<PIXEL Heart1>, 크립토복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