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용의 퍼스펙티브

2025-02-22 · ART_PHOTO

대표 이미지

사랑과 욕망, 말라선 안 될 인생의 두 수원(水源)


-심상용(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사랑과 욕망

   얀 샤우덱은 사진과 회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모든 경계에는 권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장르도 다르지 않다. 모든 장르들이 동등했던 적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순수와 실용, 회화와 공예…, 초기에는 사진과 회화도 그랬다. 회화와 대등한 사진의 예술성을 증명하려는 목적에서,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의 회화주의 사진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스타이켄은 젊은 샤우덱이 동경했던 사진가였다. 하지만 샤우덱은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고, 당대의 조류에 올라타는 것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가 사진과 수채화의 경계를 오갔던 것은 형식적, 장르적 변주의 차원을 넘어, 그가 경험했던 생명과 몸, 사랑과 욕망의 내적 필연성 때문이었다. 


   사랑과 욕망, 말라선 안 될 인생의 두 수원(水源)이다. 진짜 비극은 사랑하고 욕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세상과 타자와 연결시켜주는 두 개의 수원이 말라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파스칼 브리케네르(Pascal Bruckner)가 욕망이 무욕보다 낫다고 하는 이유다. 존재가 무존재보다 나은 것과 같은 이치다. 종종 그것의 통제에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침묵하면 타나토스가 벌써 이긴 거다.”샤우덱에게 인간의 벗은 몸, 특히 여인의 몸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하게 그랬다. 
   누드는 그에게 장르 이상이다. 쇄도해오는 타나토스, 곧 죽음에 대항하는 신비로운 원석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Gabriel H. Marcel)에 의하면‘사랑한다’는 말은‘너는 죽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욕망은 나도 또한 살아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고자 하는 충동이다. 그렇게 시간을 허무에서 건져내고, 지지부지한 일상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 최전선이 몸이다. 어떤 것도 그것의 선(善)과 아름다움의 원천을 손상시킬 수 없다. 시간은 단지 그것의 외형을 공격할 뿐이다. 과장이나 장식은 불필요하다. 의복은 하찮은 사회적 기제일 뿐이다. 나무의 갈라지고 터진 각질과도 같은 것이다. 
 

/
전문은 사진전문매거진 <월간사진> 3월호에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