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들의 처음처럼 그때처럼

2021-01-04 · ART_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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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개인전 (2002) _ 고정남
도쿄종합사진전문학교 재학 시절, 고정남은 학교를 졸업하면 첫 개인전을 가지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 했던가. 2002년 1월, 정말로 그의 첫 개인전이 ‘갤러리 룩스’에서 열렸다. <집, 동경 이야기>는 다다미 쇼트(Shot)의 촬영 미학을 구사한 일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를 차용한 작업이다. 정지한 듯한 화면, 절제된 카메라의 움직임, 회화적 구성을 통해 성찰적 시선을 반영한 그의 영화처럼, 고정남 역시 ‘4x5 뷰 카메라’로 정갈한 프레임을 선보였다. 당시 고정남은 3학년 때 지도교수이자 사진가인 시바타 토시오(柴田敏雄)에게 서문을 받았으며, 그의 작업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상건축>에 게재된 바 있다. 한편, 시바타 토시오는 고정남 작업에 대해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감과 스릴, 특히 가지각색의 상상력을 그려 세울 수 있는 공간이 그의 사진 속에 있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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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동경 이야기>(2002.1.16~1.22)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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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동경이야기 #07, Tokyo, Nakank-ku, Gelatin Silver Print, 20X24inch,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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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남의 첫 개인전이 열렸던 ‘갤러리 룩스’

 


 


나의 첫 번째 검프린트 (1996) _ 김수강
대학원 3학기 때 검프린트를 접한 김수강은 첫 번째 과제를 제출하고 난 뒤 검프린트가 자신의 운명임을 직감했다. 그러고 보니, 사물을 조용히 응시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물의 ‘숭고한 순간’을 따뜻한 회화적 감성으로 표현하는 게 김수강의 차분한 성격과 참 많이 닮았다. 그날 이후 김수강은 졸업할 때까지 1년 6개월 동안 학교의 비은염 작업실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유학 시절 탄생한 검프린트로 그는 1998년 5월 인사동 ‘갤러리 2000’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는 데 정신적인 밑거름이 되어준 은사는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필립 퍼키스다. 그는 김수강의 작업을 예리한 눈으로 보고, 김수강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간결하고 정확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김수강은 “필립 퍼키스 말에는 내가 진심으로 즐기면서 힘을 빼고 작업할 수 있도록 이끄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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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2000’에서 열린 김수강 개인전(1998.5.6~5.13)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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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로 처음 제작했던 검프린트





 


 


나의 첫 개인전 (2001) _ 조습
2001년 6월, 조습은 25세 나이에 첫 개인전 <명랑교 첫 부흥회 “난 명랑을 보았네!”>를 인사미술공간에서 가졌다. 문예진흥원 공모에서 그의 작업이 선정되어 열린 기획초대전이기도 했다. 조습은 당시 반공, 순결, 가부장 등의 타이틀을 가상의 종교 ‘명랑교’로 윤색하여 작품을 제작했는데, 사이비 교주를 연상시키는 작업 속 그의 모습은 지금 봐도 뇌리에 박힌다. 그는 전시를 통해 집단주의와 민족주의 등에 대한 야유와 그와 관련된 우리들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고 씁쓸하게 꼬집은 방식 때문에 그의 첫 개인전은 강렬하게 다가온다. 세간의 관심처럼 많은 관객들이 당시 조습의 전시장을 찾았고, 일부 관객이 의도치 않게 작품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가벼운 미학으로 사회의 부조리한 면들에 맞서고자 했던 그의 의도는 결과적으로 전시를 통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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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습 개인전 <명랑교 첫 부흥회 “난 명랑을 보았네!”>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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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습 개인전 <명랑교 첫 부흥회 “난 명랑을 보았네!”>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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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조습 개인전 <명랑교 첫 부흥회 “난 명랑을 보았네!”> 전시 도록



나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2001) _ 한홍일
왼쪽 사진은 2001년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함께 했던 에디토리얼 작업이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한홍일 ‘꽃 사진’의 ‘프로토타입’으로 보면 된다. 현장 반응은 좋았지만, 며칠 후 난리가 났던 사진이기도 하다. 브랜드 이름이 명확하게 안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클라이언트들은 프로젝트에 한홍일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옷과 모델을 그대로 찍기보다, 이를 통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것이 패션 사진가의 역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위의 작업(1996)은 독립 후 제작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있는 사진이다. 상업 사진가의 포트폴리오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실험적인 시도다. 모델 이혜상을 찍은 폴라로이드와 앤티크한 소품을 8mm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다음, 이를 다시 제니스 텔레비전에 띄워 필름 카메라로 담아냈다. 주사선과 불분명한 이미지가 아련한 느낌을 주는데, 이 역시 ‘꽃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애틋함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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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함께 했던 에디토리얼 작업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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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로이드(모델 이혜상)와 8mm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제작한 작업(1996)을 포트폴리오 첫 장에 배치했다.



나의 첫 개인전(1999) _ 강용석
“이 사진들은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 찍은 것인가요?” 1999년 7월, 첫 개인전 <매향리 풍경>을 열었던 강용석이 전시 첫날 어느 신사에게 들은 질문이다. 전쟁 이후에 남겨진 이데올로기와 그 특유의 풍경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던 강용석은 그 질문을 받고, 자신이 의도했던 바가 성공했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좋은 사진이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서 매향리가 지닌 특유의 지형과 사진 톤이 부각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했던 ‘대안공간 풀’에서 박찬경의 기획으로 열린 강용석의 첫 개인전은 한국 현대사가 지닌 비극성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드러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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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열린 전시 <매향리 풍경>(1999.7.28~8.10) 리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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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강운구(왼쪽), 송정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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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석과 백제예술대학교 사진과 졸업생들

 


 


나의 첫 번째 카메라(1975) _ 강재훈
1975년 여름 무렵, 중학교 3학년이었던 강재훈은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된다. 그의 매형이 대학생 시절 사용하던 소련제 Zenite-E(제니트) 카메라 세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가방 속에는 카메라뿐 아니라 지금은 구하기조차 힘든 다양한 렌즈들이 함께 담겨 있었다. 선물 하나가 그의 인생을 안내했다고 봐야 할까. 그의 품에 안긴 최초의 카메라가 결정적 계기가 되어 강재훈은 고교로 진학한 뒤 사진반 활동을 시작했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한 장비를 뽐내며 사진에 재미를 붙였다고 한다. 강재훈이 지금까지 카메라를 사용한 시간만 해도 45년, 그가 따듯하고 정겨운 시선으로 포착한 수많은 사진은 소중한 선물 덕분에 탄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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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훈이 1975년 촬영한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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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훈의 첫 카메라 Zenite-E 세트

 


 


나의 첫 개인전(1998) _ 이정록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이정록은 석사청구 개인전을 위해 일주일에 3~4일을 김제, 나주, 부안, 정읍 등지에서 보냈다. 그는 홀로 들에 서서 대지에 햇빛이 쏟아지기까지 기다렸다가, 밑에서 꿈틀거리던 음기와 위에서 쏟아지는 양기가 서로 뒤엉켜 격렬하게 요동치는 그 순간을 기록했다. 흑백필름에 박제된 ‘자연의 정기’를 표현하기 위해 (코닥 엘리트 파인아트 인화지를 구하고 싶으면 이정록에게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인화지로 테스트를 했고, 암실 한 구석에 쓰러져 잠들 정도로 인화에 온 힘을 다했다. 이렇게 탄생한 작업이 바로 <남녘땅>이다. 그러나 전시 기획은 녹록지 않았다. 이정록이 전시하길 원했던 인사동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우리는 사진 전시 안 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 어쩔 수 없이 예전에 그룹전을 했던 갤러리를 찾아가 대관 신청을 했다. 비록 사진이 인사동에서 그런 대접을 받았던 시기였지만, 전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는 1998년 그가 28세이던 해, 첫 개인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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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업 <남녘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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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업 <남녘땅>



사진 스승과의 첫 맛남(1998) _ 김지연
1998년 무렵 전주에 살던 김지연은 서울로 향했다. 당시 새로운 방식으로 한국의 풍경을 표현하던 김장섭이 ‘서울사진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학생과 아마추어 등을 대상으로 사진 특강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한 번만 수업을 들어보겠다는 생각도 잠시, 김장섭의 수업은 그녀에게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단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사진에 대한 방대하고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진가들의 작품세계와 이론 등을 소개하는 그의 수업은 상당히 유익했다. 인생은 우연에 의해서 흘러간다고 했던가. 김지연은 그 이후로 1년 반 동안 김장섭의 수업에 참여했다. 그것이 사진에 대한 내공을 쌓고, 작가로 진로를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현재 김장섭의 건강문제로, 직접 그에게 안부의 인사를 건넬 수 없지만, 김지연은 자신을 사진가의 길로 이끌어준 첫 스승과의 소중한 기억과 고마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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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섭(가운데), 김지연(오른쪽에서 두 번째), 서울사진아카데미 학생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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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섭(왼쪽에서 세 번째), 김지연(오른쪽에서 첫 번째), 서울사진아카데미 학생들. 1999년